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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 CF의 역사

 

4. 푸차데스의 시대

 

 전만큼 좋은 성적을 반복하기는 힘들었지만, 50년대 특히 그 전반기는 다시 언급할만한 가치가 있는 시대였다. 좋은 선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팀 성적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레알 마드리드의 디 스테파뇨, 바르셀로나의 쿠발라 같은 뛰어난 외국인 선수들이 스페인 리그에서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50년대 가장 뛰어났던 발렌시아CF의 선수는 의심할 여지없이 안토니오 푸차데스였다. 수에카 출신의 푸차데스는 매우 빠르게 팀의 간판선수가 되었고, 은퇴할 때까지 팀의 주축이 되었다.

 

 이 시기에 경기장 증축으로, 메스타야는 더 큰 구장이 되었다. 클럽의 목표는 많은 발렌시아 서포터들이 들어오기에 충분한 경기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로 인한 재정적 문제로 좋은 선수를 데려오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메스타야를 45,000석으로 증축을 하는데는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던 1억 페세타가 들어갔다. 덕분에 메스타야는 스페인에서 최고 구장 중 하나가 되었으며, 1982년 월드컵과 1992년 올림픽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하신토 킨코세스 역시 1950년대에서 언급해야 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를 중심으로 젊은 선수들이 하나가 되어 많은 활약을 했다. 그는 1948년부터 1954년까지 발렌시아CF의 감독을 맡았다.

 

 1950/51시즌에는 1부 리그가 16개 팀으로 확장되었다. 발렌시아CF의 성적은 오르락 내리락했지만, 메스타야에서 만큼은 강팀들을 상대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데포르티보, 셀타비고에게 패하고, 산탄데르, 레알 소시에다드와 무승부를 거두면서 3위의 성적으로 리그를 마치게 된다. 그리고 스페인 컵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에 의해 초반에 탈락을 하게 되었다. 루이스 카사노바 회장은 사임 의사를 밝혔지만, 클럽은 그에게 신뢰를 보였고, 그는 1959년까지 회장직을 맡게 된다.

 

 발렌시아CF는 50년대 스페인 컵 결승에 2번 오르게 된다. 그 상대는 모두 바르셀로나였다. 첫 번째는 1952년으로, 리그 5위라는 그리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이는 킨코세스 감독 하에서 최악의 성적이었다. 세비야와 사라고사를 꺾고 준결승에 오른 발렌시아CF는 준결승에서도 레알 마드리드를 물리쳤다. 하지만 5월 25일 열린 결승전에서, 발렌시아CF는 먼저 2골을 넣으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지만, 후반에 4골을 내리 실점하며 2-4로 패배하고 말았다.

 

 1951/52시즌에는 메스타야 팀이 2부 리그에 참가했다. 에란디오와 같은 경험 많은 선수가 가세하며 메스타야는 2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승격 리그전에서 히혼, 산탄데르, 알코야노, 로그로네스, 페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클럽은 메스타야 팀의 승격을 포기했다. 1944년 메스타야 팀을 만들 당시 1군 선수 양성을 위한 팀이라는 것을 표명했었지만, 메스타야 승격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1952/53시즌은 발렌시아CF에게 괜찮은 시즌이었다. 메스타야에서 올라온 센드라, 마뇨, 만그라냔, 소크라테스 등의 젊은 선수들을 바탕으로 선수단을 개편했고, 경기 결과도 좋았다. 하지만 마지막 달에 바르셀로나에게 추월을 당하며, 리그 2위로 시즌을 마쳤고, 컵에서도 바르셀로나에게 결승전에서 패하고 만다.

 

 이듬해, 킨코세스가 이끄는 발렌시아CF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이어 리그 3위를 기록한다. 이 시즌 최고의 성적은 바로 컵 대회였다. 결승에서 다시 바르셀로나를 만난 발렌시아CF는 3-0 승리를 거두며 지난 시즌의 설욕을 갚았다. 1954년 6월 20일의 그 경기에서 푸에르테스가 2골, 바데네스가 1골을 넣었고, 골대 앞에 앉아있던 키케 골키퍼의 모습은, 당시 발렌시아CF가 경기를 얼마나 유리하게 전개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 영상으로 남게 되었다.

 

 이 우승을 마지막으로 루이스 카사노바 회장의 영광의 시대가 막을 내린다. 이 후 팀은 전환기를 맞이했고, 50년대가 끝날 때까지 발렌시아CF는 리그에서 우승하지 못했고, 컵 대회 결승전에도 진출하지 못한다.

 

 1950년대 후반, 푸차데스를 비롯해서 뛰어난 선수들이 발렌시아CF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세르바스 윌키스로, 마치 곡예사처럼 공을 다루며 3시즌 동안 팬들을 매료시켰다. 나바라 출신 후안 카를로스 킨코세스는 11년 동안 흰 유니폼을 입으며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보였다. 그는 1954/55~1958/59시즌 동안 모든 공식경기에 출장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컵 대회 포함 120경기 연속 출장) 1956년 1월에는 마놀로 메스트레가 발렌시아CF 데뷔전을 가졌다. 그는 90년대의 히카르도 아리아스가 나오기 전까지, 발렌시아CF의 리그 최다 출장 선수였다.

 

 1957년 발렌시아 도시는 대홍수에 휩쓸렸고, 클럽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재해 이후, 클럽은 평범한 몇 년을 보내게 된다. 또한 약 20년 동안 클럽을 이끌어온 루이스 카사노바 회장도 은퇴를 하게 되는데, 절친한 조력자였던 루이스 콜리나의 사망이 큰 이유였다. 새 회장으로 비센테 이보라가 취임했고, 그와 그의 후계자인 훌리오 데 미겔의 시대에는 발렌시아CF가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