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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 CF의 역사

 

3. 40년대, 우승의 시작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 발렌시아CF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야 했다. 1936년 팀에 소속되어 있던 많은 선수들이 3년이 지난 후, 팀을 떠났다. 전쟁으로 인해 축구보다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1939년, 알프레도 히메네스 부에사가 회장으로 새로 선출되었고, 루이스 카사노바가 부회장이 되었다. 새로운 체제의 주 목적 중 하나는 공화정치의 기억을 지워내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메스타야 구장이 전란 중에 크게 손상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경기장 리모델링 공사를 하며 수용인원을 22,000명으로 늘린다.

 

 히메네스의 임기가 끝난 후, 회장직은 루이스 카사노바에게 넘어갔고, 그의 체제 하에서 클럽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10시즌 동안, 발렌시아CF는 리그 3회, 코파 델 레이 2회 우승을 기록한다. 이런 성공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에피, 문도, 아센시, 고로스티사로 구성된 엄청난 공격진을 갖추고 있었고, 루이스 카사노바 회장의 통솔력도 뛰어났으며, 교체 멤버였던 쿠벨스, 몬초 엔시나스, 파사린, 하친토 퀸코세스의 활약도 뛰어났다. 메스타야 경기장을 재건하면서 B팀인 데포르티보 메스타야도 만든 것도 이 시기이다.

 

 또한 발렌시아CF가 최고의 팀이라는 것에 이견을 달 수 없던 이유는, 이그나시오 에이사기레라는 최고의 골키퍼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중앙 수비수(알바로, 후안 라몬), 그리고 발렌시아 출신 2명, 바스크 출신 3명으로 구성된 완벽한 공격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선수들로 구성된 팀은 1941년,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한다. 그 후 두 번의 우승을 추가하며 발렌시아는 환호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런 성공으로 발렌시아CF는 스페인 축구계에서 빅 클럽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공의 최고조는 41/42시즌 클럽 역사상 리그 첫 우승을 거둔 것이었다. 당시에는 컵 대회가 리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긴 했지만, 그 업적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시즌의 발렌시아CF는 정말로 대단했다. 메스타야는 요새나 다름없었고(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 만이 승리를 거두었다), 26경기에서 85골을 넣으며 득점 기록을 갈아치웠다. 더욱이 에드문도 수아레스 '문도'는 27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한 시즌 후인 43/44시즌에 발렌시아CF는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이 시즌에 발렌시아CF는 리그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1위를 고수했다. 이 시즌에 발렌시아CF를 이긴 팀은 바르셀로나(3-4)가 유일했으며 문도는 다시 27골을 넣으며 피치치가 되었다. 이렇게 4시즌 동안 3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린 대단한 성공을 거둔 40년대였지만, 항상 즐거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발렌시아CF는 코파 델 레이 3연속 준우승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클럽이다. 1944년부터 1946년까지 내내 결승전에서 패하고 말았다. 발렌시아CF는 1970~1972년에도 3연속 준우승을 다시 기록한다. 이 3연속 결승전은 모두 바르셀로나의 몬주익 경기장에서 치뤄졌으며, 그 당시 발렌시아CF의 서포터들에게는 징크스로 다가왔다.

 

 46/47시즌, 발렌시아CF는 3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유소년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시즌은 매우 힘겨웠다. 8라운드 성적이 밑에서 두 번째일 정도로 최악의 성적으로 시즌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라운드가 될 때까지 누가 우승할지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아틀레틱 빌바오가 우승을 달성할 것이라 예상되고 있었고, 발렌시아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발렌시아는 스포르팅 히혼을 6-0으로 꺾었지만, 빌바오는 데포르티보 라 꼬루냐와 3-3으로 비기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2-3으로 패했다. 발렌시아는 빌바오와 승점이 같았지만, 승자승 원칙(발렌시아가 빌바오에게 2승을 거둠)에 의해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되었다. 당시에는 라디오나 TV 중계가 없었기 때문에, 이 소식은 전화를 통해 퍼져나갔다.

 

 바르셀로나에서 3연속 준우승에 그쳤던 코파 델 레이였지만, 1949년 결승전은 마드리드에서 열렸다. 빌바오와 발렌시아CF의 경기는 매우 어렵게 진행되었지만, 에피의 골로 40년대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